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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4 육체의 가시 (고후 12:6-10)
작성일 :  2020-06-24 16:34
이름 :  admin E-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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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 바울은 최상의 은혜생활을 하던 자였습니다. 주의 환상과 계시, 그리고 신비로운 은총 체험 때문에 그의 가슴은 항상 감격의 기쁨 속에 적시워 살고 있습니다. 그는 영감 중에 셋째 하늘(천국)의 체험까지 했습니다. 바울의 영계(靈界)는 이렇게 풍요롭고 찬란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놀랍게도 큰 고통거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를 가리켜 육체의 가시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인간 삶의 한 면을 보게 됩니다. 그가 말하는 육체의 가시

  

  一. 이 땅에 사는 신자의 삶의 상황을 말합니다.

  신자도 이 세상에서는 항상 면키 힘든 괴로움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의 복된 은총 속에서 천성을 향하여 성화의 길을 걷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선한 일에 힘쓰는 우리에게 너무도 아픈 일이 많다는 이것입니다. 바울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는 하늘의 계시와 주의 환상 때문에 은혜 충만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반면에 땅에 있는 가시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그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가 무엇일까? 마귀의 사촉으로 오는 망령된 생각? 어떤 육체의 질병?... 등 유력한 해석은 안질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6:11,15). 그는 이 육체의 가시가 1. 사단의 사자라고 했습니다(7). 2. 그 가시는 바울을 치는 정도다고 했습니다. 3. 그 가시는 바울에게 전혀 불필요한 정도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위해 세 번이나 주께 간구할 정도로 괴로운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볼 때에 신자는 그가 믿음의 조상이건, 선지자이건, 왕이건, 사도이건, 어떤 신령한 성도이든지 간에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예외 없이 가시 같은 육체의 연약 때문에 괴로워 하는 일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혹자에게는 허약, 혹자에게는 빈곤, 혹은 불신 골육, 자녀의 방탕, 혹자는 자신 속에 있는 특별한 가시. 예컨대, 시기, 욕심, 공명심, 정욕, 방탕...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같은 것이 가시가 되어 찌를 때 괴로운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또한 여기가 천국이 아닌 세상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역설적 한계 상황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자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주의 환상과 계시와 육체의 가시! 참으로 역설적인 현상입니다.


  二. 육체의 가시는 주님을 만나는 기회가 됨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는 분명히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이 주신 것은 좋지 않음이 없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육체의 가시로 말미암아 주님을 더욱 가까이하는 좋은 기회로 삼았습니다. 1. 겸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바울을 낙원에까지 이끌어 체험케 해주셨습니다. 반면에 주님은 사탄의 사자 같은 육체의 가시를 주셨습니다. 이유는 그가 받은 은혜를 지속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누가 말하기를 겸손은 은혜 받는 비결이며 또한 그 은혜를 지키는 비결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능력만 붙들기 위함입니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라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3. 기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해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세 번 주께 간구함은 힘써서간절하게완전한 기도를 했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설명할 때 세 번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 기도의 강세를 의미합니다.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찾아오신 주님이 세 번 질문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는 주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기도하기를 쉬는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 시편 성도는 저희는 나를 대적하나 나는 기도할 뿐이라(109:4)고 했습니다.

 

  三. 육체의 가시는 은혜생활의 표지입니다.

  1. 기도응답의 표지입니다. 바울은 기도할 때에 가시를 없이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 결과 가시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기도는 응답을 받은 것이 있었습니다. 본문 9절에 내게 이르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가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데 하나님의 능력은 바울의 약한데서 강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기도응답입니다. 우리는 기도 응답이 내 원하는 대로 되어야만 응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곧 그것이 기도응답입니다. 2. 감사생활의 표지입니다. 바울은 이 응답을 깨닫고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역설적 기쁨입니다. 가시 때문에 기뻐하고 가시를 오히려 자랑합니다. 정말 믿음의 깊은데서 나오는 역설적인 그리스도인의 기쁨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특색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약자의 복음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약할 그때 곧 강합니다. 즉 죽고자 할 때 살고, 잃고자 할 때 얻고, 낮아지고자 할 때 높아지고, 무명할 때 유명하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을 때 실상은 모든 것이 있는 종교입니다.(고전 1:26-31). 이상하게도 역사상의 폭군들이 기독교를 박해하여 교회운동을 진멸하려 할 때 사실상 교회와 신자는 강했습니다. 지금 정치와 사회적으로 확대되어가는 반성경적 풍조는 분명 표면적으로는 기독교에 적신호입니다. 그러나 이때 참교회가 교회되는 순간입니다. 육체의 가시! 그것은 역설적인 상황 속에 사는 신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첩경입니다. 그것은 은혜생활의 표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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